1876년부터 1909년까지의 시기로 서양식 장신구가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간지에는
보석 반지 광고가 실렸는데 이미지가 없어 외양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광고를 게재한 상점 들이 외래품 취급점임을 고려할 때 보석 반지 또한 외래품으로 추정된다.
일본 도쿄의 긴자 에 위치한 천상당은 1899년에 수입 회중시계와 각종 보석 반지를 취급하고 있었으며 1905 년에는 조선으로 건너와 출장 판매를 하기도 했다.
한편 전통 금은기류와 장신구를 제작한 대표적인 세공소로는 한성미술품제작소가 있었다. 한성미술품제작소는 현재의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하였으며 왕궁과 관청 등에 납품하였다.
1910년 조선을 병합한 후 일본은 원시산업 육성과 일본상품의 소비시장화를 추진하였다.
일본의 상품 수출이 급증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중 장신구 광고는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 였다. 다음은 1917년 1월 13일,
매일신보에 실린 일본 상점, 촌목시 계포의 광고이다. 다양한 디자인의 반지를 볼 수 있으며 ‘금강석 든 반 지’, 즉 다이아몬드 반지도 취급했 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하단에 는 다이아몬드 반지 안에 주소와 상호를 넣고 이후 광고에서도 계속 사용하여 오늘날의 로고(logo)처럼 쓰였다.
1920년대에는 1910년대에 비해 장신구 광고가 현저히 줄었으며 이전과는 매우 다른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바로 모조품 광고로 합성금, 모조 다이아몬드 반지, 백금 대용 반지가 소개되었다. 합성금의 가격은 순금의 1/10로 저렴하지만 광채는 뛰어나다고
광고했으며 반 지를 비롯하여 비녀, 빗치개, 귀이개 같은 전통 장신구도 합성금으로 제작하였다.
모조 다 이아몬드 반지, 백금 대용 반지도 있었는데 1926년 6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세계적인 대공황과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장신구 광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1938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동양시계회사의 광고가 가장 큰 광고였다. 47개의 다양한 보 석 반지들이 실려있었다.
광고 문구에는 ‘물가 등귀로 시계, 반지, 금, 백금의 가격 폭등이 예상되므로 한정 수량에 한해 대특매를 감행한다’고 쓰여있다.
한편 군수 공업화 정책으로 인한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로 국내에서 인조 보석 생산을 시도 하였다.11)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이행되면서 귀금속 산업은 급속히 쇠퇴하였으며 귀금속으 로 된 장신구는 사라져갔다.
일제강점기 때 형성되었던 영업 구조는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다. 귀금속상들은 금과 은, 백금을 주로 취급하였다.
규모가 더 큰 경우 보석과 시계를 함께 취급하였으며 세공과 수리를 하였다.
당시 신문 광고를 했던 상점들을 위치별로 분류하면 종로에는 대명공사, 한청금은 방, 충무로에는 대동사, 명옥당, 보옥장, 경미당, 남대문에는 삼창이 있었다.
6·25전쟁 이후 화신백화점의 금은부와 동화백화점의 귀금속부는 신문 광고를 적극적으로 하였으며 판촉 행사 로 다이아몬드를 경품으로 주기도 하였다.
화신백화점은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폐점되었다가 1953년에 입점 업체 들을 모집하며 재개하였다. 다음은 1955년 동아일보에 실 린 화신백화점 금은부의 광고이다.